복음 안내서  

By Rob T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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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

사도 바울은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계속 그렇게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복음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인데 (고린도전서 1:23), 그것이 모든 자랑을 금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7). 그러므로 참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대체하려는 강한 유혹이 있다 (갈라디아서 1:6-7). 심지어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했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 사람들은 “잘 달렸는데” (갈라디아서 5:7),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는 (갈라디아서 5:11)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진리에 순종하는 데 방해를 받았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그러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고 (사도행전 20:29),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 (고린도후서 11:4)에 대해 경고하기까지 했다. 복음은 하나님의 원수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가려서 사람들이 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4:3-4).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고린도후서 13:5) "주여, 그게 나니이까?" 라고 자문해 봐야 한다 (마태복음 26:22). 내가 다른 복음이나 다른 영 또는 다른 예수를 받았는가? 이 짧은 책의 목적은 복음을 분별하고 복음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구별하여 독자가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바로 알기↑

복음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또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을 너희에게 밝히 알리노니 너희 역시 그 복음을 받았으며 또 그 가운데 서 있느니라.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것을 기억하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고린도전서 15 장 1 ~ 4 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아직 불신자일 때 그들에게 선언한 메시지를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믿든 말든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를 선포했다.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 (고린도전서 1:18).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멸망하든 구원받든 관계없이 진리는 여전히 동일하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바울과 나머지 사도들이 가르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1).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고 하나님의 피조물의 행위나 믿음과 같은 다른 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로 구원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남아 있지 않다. 온 세상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5:14-21, 요한복음 1:29, 요한일서 2:2).

우리의 어려움 중 하나는 성경에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복음과 관련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복음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절대적인 의미로 선언되거나 상대적 의미로 선언될 수 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예외 없이 성취하고 보장하셨다. 상대적으로 각 사람은 믿음을 통해 이 구원에 개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나는 이 상대적인 구원의 의미를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지만, 지금은 절대적인 측면에 대한 나의 주장을 더 분명히 밝히고 싶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의 이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 편에서 해야할 일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인 것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 선언할 수 없게 된다. 그들도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다르다. 그들의 말은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는 의미인데, 흔히 이 “이렇게 이렇게 한다면”라는 것에는 죄인의 기도를 드리거나, 교회의 제단 앞에 나와 엎드려 특별한 기도를 하거나, 입으로 주예수님을 시인하거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하거나, 죄를 회개하거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절대적 측면과 상대적 측면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 (즉, 절대적)이라고 선포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도다 (즉, 상대적) (고린도전서 1:21)고 선포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 (요한복음 1:29, 4:42, 요한일서 4:14)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앞선 논의와 잘 어울린다. 이것은 절대적인 선언이다. 그분이 실제로 세상을 다 구하지 않으신다면, 그를 세상의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이 실제로 맞는 말이 되는 것은 오직 그분을 세상의 구원자로 인식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어떤 일을 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은 "그리스도는 아마도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성경의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볼 때 이와같이 부지 중에 성경 말씀을 바꿔버리고 만다.

예수님은 세상죄를 성공적으로 제거하시고 (요한복음 1:29)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요한복음 6:33),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고 (요한일서 2:2), 사망을 폐하시는 분이다 (디모데후서 1:10). 우리는 이런 것을 믿어야 한다. 이런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오해나 불신으로 인해 우리도 모르게 성경을 바꾸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집안사람들에게 할지니라" (갈라디아서 6:10)라는 권면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니라" (디모데전서 4:10)라는 말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생긴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게 되며, “특히”라는 단어는 구원자를 가진 모든 사람 중에서 믿는 자들의 구별된 위치를 의미하지 않게 된다. 대신 "모든 사람"은 "일부 사람"을 의미하게 되고 "특히"는 "하지만 실제로는 ~만"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실제적이 아닌 잠재적인 구원자로 축소되며 모든 사람은 단순히 구원받을 가능성만 있게 된다. 이런 일들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오해와 불신은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큰 이유이다.

성경에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차이를 이해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명확해 보이는 일부 가르침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아담보다 크다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고린도전서 15:47)라고 들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도 만드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1:3, 10, 골로새서 1:15-16), 아담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 (로마서 5:12), 예수님은 적어도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아담이 실제로 예수님보다 컸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버려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15:22). 그리고 그는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단순히 되찾을뿐만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45). 그분의 아버지께서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에베소서 2:6). 그렇다! 이것은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것보다 훨씬 넘어선다! 그래서 담대하게 믿자. 위의 구절들을 믿지 않을 구실은 정말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 아래 놓인 것을 보지 못하고" (히브리서 2:8)는 사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고 (고린도전서 15:22),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빌립보서 2:11),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주를 찬양한 후에 (시편 145:10)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 그분께서 반드시 통치해야 한다는 (고린도전서 15:25-28) 것을 믿자.

구원받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의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정하신 때가 이르면 개인적으로 이 구원에 참여하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 (디모데전서 2:6). 여기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 단어는 실제로 복수형이며 헬라어나 어느 문맥에서도 이 단어를 현생에 한정할 근거는 없다!

상대적 의미에서 (즉, 인간 경험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은 이 구원에 개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믿음이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사도행전 16:30)라고 물으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1)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실제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믿을 때에 우리는 개별적으로 그의 구원을 경험한다 (에베소서 1:13-14). 그러나 믿음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해야 한다. 구원의 자격을 이루는 것은 믿는 자의 믿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믿는 자의 믿음은 하나님께 그 믿는 자를 구원하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오히려 믿는 자의 믿음은 믿는 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 중 하나이며 긍휼의 그릇 (로마서 9:23)이며 현생 동안 이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의 보증이 된다 (에베소서 1:13-14, 2:5, 골로새서 1:13).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다시 말해, 현생 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롭게 믿음을 주 신다 (빌립보서 1:29). 그들은 그의 창조물 가운데 첫 열매이며 구원의 첫 열매이며 (야고보서 1:18, 요한계시록 14:4, 데살로니가후서 2:13 ~ NA27)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사람들이다 (에베소서 1:12). 남은 열매 (즉, 결코 믿지 않아 멸망하는 사람들)는 심판 후에 구원과 영광의 상속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 심판에는 "분개와 진노, 환난과 고뇌"가 포함되고 (로마서 9:22, 로마서 2:8-9), 이 때 사망이 멸망받은 후, 즉 둘째 사망 (즉, 그때 남은 유일한 불 호수의 사망 ~ 요한계시록 20:14)이 멸망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 (고린도전서 15:22-28).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두에게, 심지어 불신에 갇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로마서 11:32)!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복음인가! 이것은 당신에게 "할렐루야!"가 저절로 터져나오게 한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선포, 즉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보장하셨으며 사람들이 단지 믿음을 통해 이 구원의 개인적인 경험에 들어간다는 것이 육체를 따라서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완전히 무관하며 단순히 믿음만으로 누리는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리석어 보이고 큰 걸림돌이 된다 (고린도전서 1:21, 로마서 4:4-8, 로마서 11:6, 로마서 9:30-33).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 즉 ‘이것은 선물이다’ (로마서 6:23, 에베소서 2:8-9)라는 말씀을 믿지 않고, 갈라디아인들처럼 그들은 미혹되고 주문에 걸려서 (갈라디아서 3:1) 가공적인 구원의 요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라는 진리에 굳게 서자.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명확히 하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복음이 절대적인 의미로만 선포되어야 한다는 인상을 줬을지도 모른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실제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것).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정확하지 않다. 복음은 또한 상대적으로도 선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도다" (로마서 5:1)라고 선언하는 것을 해도 괜찮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는 절대적인 정보를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필수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절대적인 것이 설명되지 않으면, 모든 경우에서 예외없이 행위가 복음에 끼어들게 될 것이다. 행위는 하나님께 그 행위하는 자를 구원하도록 강요한다고 생각되는 죄를 회개하는 것 또는 다른 공로의 형태로 구원의 조건이 되어 나타날 것이고, 그리고/또는 믿음의 계속됨이나 선행의의 존재 형태로 구원의 사후 조건으로 나타날 것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 자체도 행위가 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믿음은 하나님께 그 믿는 자를 구원하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믿음은 믿는 자에게 단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보증이 되는데, 그리스도가 구원의 일을 행하셨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 (갈라디아서 2:16)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행위를 하나라도 추가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무효가 된다 (로마서 11:6, 갈라디아서 5:11, 갈라디아서 2:21). 우리는 항상 행위에 근거한 구원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람에게" 임했고, 상대적으로 말해서 "믿는 모든 사람에게" (로마서 3:22)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전도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것에 관한 올바른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복음 선포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격려하고 싶다. 특히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도다”는 것을 믿자 (고린도전서 1:21).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불신자들이 초대, 강권 또는 다른 인간적인 방법 없이 믿는 자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에 있는 바와 같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언을 너희에게 밝히 말할 때에 말이나 지혜의 뛰어난 것을 가지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나니 나는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느니라.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며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 안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 안에 서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계속 올바르게 지키기 위한 질의응답↑

이제 앞의 섹션에 관한 몇 가지 빈번한 질문에 답하겠다.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다고 확신할지라도 여기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을 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은데, 이 답변들이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루지 않은 질문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 답변 중에서 간접적으로 그 답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질문 8은 주로 요한일서에 관한 것이지만 마가복음 9:43-48도 다루고 야고보서 2:14-26에 대한 몇 가지 추가 해설도 제공한다.


질문 1. 마태복음 25:46은 영존하는 형벌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우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와 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한 많은 분명한 성경구절과 모순될 것이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마태복음 25:46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존하는"과 "영원한"이라는 단어의 의미과 "형벌"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를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 재번역해야 하거나, 혹은 "영존하는"과 "영원한"및 "형벌"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 성경의 다른 구절과 신중하게 대조해야 한다. 내가 이 둘 다를 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나는 "영존하는 형벌"이 실제로 끝없는 고문을 의미한다면, 성경에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먼저 질문부터 하나 하겠다. 가령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디모데전서 4:10)이며,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고린도후서 5:19)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고 (요한복음 1:29)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요 (요한일서 2:2), 세상의 구원자시요 (요한일서 4:14),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신다면 (에베소서 1:10),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신다면 (골로새서 1:20),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면 (디모데전서 2:4)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5:22),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稱義)에 이르게 하신다면 (로마 5:18), 어떻게 영존하는 형벌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모두를 구원하시는가, 아니면 그분이 내리시는 형벌은 끝이 없는가?

초기 대다수의 신학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화해 교리 (즉, 만인 구원)를 믿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권위 있는 샤프-헤르조그 기독교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초기 5~6백년 동안에 여섯 개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그들 중 네 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가이사랴, 에데사, ?니시비스)는 기독교 보편주의였고; 한 개 (에베소)는 영혼절멸 (조건부 불멸 교리)을 받아들였으며; 한 개 (카르타고 또는 로마)는 사악한 자들에 대한 영존하는 형벌을 가르쳤다" (참조: http://www.ccel.org/ccel/schaff/encyc12/Page_96.html).

초기 기독교 교회의 경우 영어 성경이 나오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화해의 가르침은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흔한 것이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원래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에 비추어 성경 말씀들을 서로 대조하여 마태복음 25:46을 다시 검토해 보자.

헬라어 원문을 볼 때, 문제는 "영존하는"이라는 단어의 번역과 "형벌"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텍스투스 레켑투스에 있는 마태복음 25:46은 다음과 같다: καὶ ἀπελεύσονται οὗτοι εἰς κόλασιν αἰώνιον οἱ δὲ δίκαιοι 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단어와 단어의 일대일 대응 번역은 다음과 같다: καὶ (그리고) ἀπελεύσονται (스스로 떠나 가버릴 것이다) οὗτοι (그들은) εἰς (속으로) κόλασιν (징치(懲治)) αἰώνιον (세(世)에 속하는) οἱ (그) δὲ (그러나) δίκαιοι (의인들은) εἰς (속으로) ζωὴν (생명) αἰώνιον (세(世)에 속하는)

보다 충실하고 축어적인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세세(世世)의 징치(懲治)에 스스로 들어갈 것이지만, 의인들은 세세(世世)의 생명에 스스로 들어갈 것이다."

이 "세세(世世)의"라는 표현은 αἰώνιον 헬라어 문자 그대로 "세(世)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世世)의" 또는 "세(世)의 특질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어느쪽이든 헬라어 문자 그대로 "세(世)에 속하는" 표현은 "영존하는", "영원한" 또는 "영원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한글흠정역을 사용하여 성경 말씀들을 서로 대조함으로써 내 번역의 정확성을 입증할 것이다. 나는 또한 한글개역판과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의 인용문을 사용하여 나의 논증을 보강할 것이지만, 한글흠정역을 사용한 성경 말씀들의 대조만으로도 내 주장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한글흠정역에서 "영존하는", "영원한" 및 "영원히"라는 단어는 시작이 없는 것과 끝이 없는 것 또는 그 어느 한 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작과 끝을 가진 분명하지 않은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은 며칠 정도로 짧을 수도 있고 수백 년 정도로 길 수도 있다.

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다서 7장을 살펴보자: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것들의 주변 도시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음행에 내주고 낯선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여 본보기가 된 것과 같으니라." 이 구절을 보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영원토록 불로 고통을 당할 운명인데,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을 에스겔 16:53-55와 대조해 보라. 소돔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성전이 완공된 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응답하시는 열왕기상 9:3을 생각해 보자: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드린 네 기도와 간구를 내가 들었고 네가 건축한 이 집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두려고 그것을 거룩하게 구분하였은즉 내 눈과 내 마음을 영구히 거기에 두리라."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은 단지 약 400 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또 다른 예는 요나서 2:6이다: "내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으며 땅이 자기 빗장들과 함께 영원히 내 곁에 있었사오나,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 생명을 썩음에서 끌어올리셨나이다.” 요나는 단지 3 일 동안만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영원히"와 "무궁한"을 대조해 보자. 누가복음 1 장 33 절에 완벽한 예가 있다: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하니라."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 장 24-28 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끝이 오리니 곧 그분께서 모든 치리와 모든 권세와 권능을 물리치시고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때라. 그분께서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그분께서 반드시 통치해야 하나니 ... 그러면 아들도 그 아래 모든 것을 두는 자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분께서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그분께서 통치하나니를 주목하라. 그분의 통치는 끝이 난다. 그분은 무궁한 왕국을 아버지께 넘겨 드리고, 그분 자신도 아버지에게 복종하게 된다.

또한 한글개역에서 이 구절들을 생각해 보자:

디모데후서 1 장 9 절에서 이것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또한 디도서 1 장 2 절에서 그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말한다. "영원한 때 전부터" 라는 표현이 여러분에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여기서 헬라어의 "때"와 "영원한"은 복수형이다. 그것은 "다수의 영원에 이어 또 다수의 영원 전에"와 같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세(世)"라는 단어의 형용사 형태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세세(世世)의 때 전부터"와 같은 번역이 더 의미가 있고 아마도 "세세(世世) 전부터"로 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한국어 성경들에서 "영존하는"과 "영원한"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시작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이 끝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성경은 대체로 분명하지 않은 기간을 다루는 책이다. 이 분명하지 않은 기간은 세세(世世)라고 하며, 이것은 금세(今世)와 내세세(來世世)를 포함한다 (에베소서 2:7). 성경은 미래의 끝없는 시기(時期) (즉, 우리가 보통 "영원"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끝없는 시기(時期)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고린도전서 15:28) 마지막 부활 (즉, 고린도전서 15:24의 "끝") 이후에 "시작"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영존하는" 또는 "영원한" 하나님으로 언급되면, 그것은 주로 이러한 세세(世世)에 걸쳐 그분의 존재, 통치, 및 주권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비록 실제로 그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의 통치와 주권이 참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만 (히브리서 1:11-12) 말이다. 요한 계시록 22 장 5 절에도 동일한 추론이 적용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성경은 말하고 있다: "[주님의 종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단지 "끝" 까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 (고린도전서 15:24-28).

이제 "형벌"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이 단어는 몇 가지 끔찍한 보복적인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 받는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행한 행동을 의미한다. 즉, "징치 (懲治)"와 동의어이다.

사도행전 4:21에서는 이 단어의 동사 형태가 사용된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이루어진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그들이 백성으로 인해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그들을 더 위협하고 가게 하니." 명백하게 여기에 있는 형벌은 그들을 바로잡고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있는 사람들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참 유대 종교로 되돌아오도록 그들을 징치하려고 했다.

"형벌" 이라는 단어는 텍스투스 레켑투스를 포함하여 모든 헬라어 사본에서 “콜라신(κόλασιν)”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플라톤은 그것의 교정(矯正)적인 본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소크라테스여, 형벌이 사악한 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면, 인류적인 견해로 볼 때 그들이 미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알게될 것이다. 아무도 악인을 그가 잘못했다는 개념으로만 혹은 그 때문으로만 처벌하지는 않는다. 단지 비이성적인 분노한 짐승만이 그렇게 오직 보복적인 처벌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형벌을 가하고자 하는 자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을 벌하기 위해서 처벌하지는 않는다; 그는 미래를 고려하고 있으며, 처벌을 받는 사람과 그가 처벌받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다시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Protagoras Sec.324:http://www.bard.edu/library/arendt /pdfs/Plato-Protagoras.pdf).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어떤가? 그들이 상속받는 삶은 분명하지 않은 기간일 뿐인가? 우리에게 마태복음 25:46 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세세(世世)에 걸쳐 발생하는 분명하지 않은 기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그들은 무궁한 생명을 참으로 상속받는다 (고린도전서 15:54).

그러므로 마태복음 25:46에 대한 이 논의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믿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시지만, 그분의 형벌에는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이 달성되면 그 형벌은 끝이 날 것이다.


질문 2. 하나님의 심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징계적이라고 가르치는 성경구절이 있는가?↑

그렇다, 있다.

우선, 성경에는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히브리서 2:8, 고린도전서 15:25-28),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밝혔다 (빌립보서 2:10-11).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다. 누군가를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강요하는 것이 어떻게 누군가의 영광이 되겠는가? 더욱이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면, 몸은 복종 당할 수 있겠지만 마음은 여전히 반역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강제적인 복종은 복종의 자격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분"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3, 시편 7:9, 잠언 21:2).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의 변화 (즉, 회개)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이 복종할 것이다. 더욱이, 사망이 멸망한 후 (고리도전서 15:26),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고리도전서 15:28). 이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이 징계적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심판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를 것이다. 로마서 2:12-16을 살펴보자. "율법 밖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또한 율법 밖에서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으리니; (이는 율법을 듣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아니하고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이런 심판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이루어지리라.” 이로부터 우리는 구원받지 않은 모든 죄인이 실제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로마서 3:9, 19-20), 이방인이 율법 밖에서 멸망한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마음 속에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나라들의 잔인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준에 따를 것이다 (15 절). 율법에서 우리는 "마흔 대까지는 때리게 하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많은 매로 그를 이보다 더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비천한 자로 여길까 염려하노라" (신명기 25:3) 라고 읽었다. 예수님께서도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이 점을 암시하신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예비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 종은 채찍을 많이 맞되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들을 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 (누가복음 12:47-48). 심판이 가혹하거나 혹은 가벼울 수 있지만 두 경우 모두 영원하지 않고 제한적이다.

다음으로 스바냐 3:8-9을 살펴보자: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서 그 탈취물에 이르는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왕국들을 모으고 민족들을 모아서 그들 위에 내 격노 곧 내 맹렬한 분노를 다 부으려고 결심하였나니 온 땅이 내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그때에 내가 그 백성에게 순수한 말을 돌려주어 그들이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마음으로 그를 섬기게 하리니."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징계적 측면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내 격노 곧 내 맹렬한 분노를 그들에게 다 부으려고”, “내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와 같은 표현이 있긴 하지만, 이 심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자신의 권능을 알리시지만 (로마서 9:22) 또한 그분의 분노를 사용하여 행복한 화해를 이루어 복종하게 하여 (히브리서 2:8, 고린도전서 15:25-28) "그들이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마음으로 그를 섬기게 하려고" 하심이다 (9 절)

요한계시록에서 한 구절을 보자. 9:20-21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재앙들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손의 행위들을 회개하지 아니하며 마귀들과 또 금과 은과 놋과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들 곧 보거나 듣거나 걷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경배하는 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또한 자기들이 행한 살인과 마법과 음행과 도둑질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요한계시록 8-9 장에서 천사들은 나팔을 불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다 붓지만 (대조. 스바냐 3:8), 우리는 고통과 사망과 재앙의 목적 중 하나는 회개하여 사람들이 악마와 우상 숭배를 그만두고 자기들이 행한 살인과 마법과 음행과 도둑질을 그치도록 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요한계시록 16:9와 16:11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하지만 (로마서 11:22), 그는 "그분의 친절한 긍휼은 그분께서 지으신 모든 것 위에 있도다" (시편 145:9) 하기 때문에 그분이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시며 항상 노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이사야 57:16). 그분은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 데 가두어 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다 (로마서 11:32).


질문 3.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는 영원한 의식적인 고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하데스의 고통의 지속 기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글흠정역에서 하데스는 "지옥"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영원한 고통을 가르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며 징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따라서 이 이야기가 사망과 부활 사이의 의식적인 중간(대기) 상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그러한 상태는 일시적일 것이다. 일시적이고 징계적인 심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질문 1과 2에 대한 나의 답변을 참조하라.

이 이야기에 관한 주요 쟁점은 사망과 부활 사이에 의식적인 중간(대기) 상태가 있는 지의 여부이다. 이 쟁점의 모든 측면에 대해 많은 언급이 있었고 여기에 깊이 들어가면 비생산적일 수도 있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이 이야기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누가복음 16:19)라고 말하며 비유처럼 시작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누가복음 16:1에서 사용한 단어와 동일하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 인물, 즉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밝히는데, 일반적인 비유는 이렇지 않다. 또한 이것은 "아브라함의 품" (누가복음 16:22)과 같은 은유를 사용한다. 그것이 비유라면, 우리는 이 은유를 해석하여 다른 비유적 표현에 도달해야 하며, 그 의미에 대해 밝혀야 하므로, 비유의 정상적인 용도를 넘어서 상황을 복잡하게 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이 아닌 것 같지만 동시에 비유에 맞지 않는 측면도 있다. 이것에 대한 나의 해석을 곧 제시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의식적인 중간(대기) 상태는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전도서 9:5와 같은 다른 구절들과 모순될 것이다. 또한 최상의 행복한 상태에 들어가는 조건이 육체 중에 있을 때 “온갖 불행”을 받는 것이고, 고통에 들어가는 조건이 육신에 있을 때 “온갖 복”을 받는 것이라면 아브라함 자신도 큰 부자였기 때문에 (창세기 13:2) 최상의 행복한 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에 빠졌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부자가 악인이라고 한 적이 없고, 우리 또한 그것을 가정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에는 나사로가 의인이라는 말도 없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전체 이야기는 에피트로페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E.W. Bullinger (에델버트 벌링거)는 "옳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잘못된 것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에 사용된 비유적 표현. 972쪽의 참조). 벌링거가 인용한 예 중 하나는 열왕기상 22:15이다: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 주께서 그 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 벌링거는 미가야가 에피트로페와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여호사밧의 마음에 있는 것을 허용하여 그것을 드러내고 비난했다고 말한다. 나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예수가 똑같은 것을 하시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여러 차례에 걸쳐 그분은 사람들의 교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무효화 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난하셨다 (마태복음 15:9, 16:6, 마가복음 7:13). 이 이야기에서 나는 예수님이 중간 상태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사용하여 돈에 대한 사랑을 책망하는 동시에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나 그들을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되돌아가게 해주시는 것으로 믿고 있다 (누가복음 16:29-31).

부자와 아브라함과 나사로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그러나 1 세기에 유대인들이 믿었던 일부 전통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의 품은 장례식 파피루스와 랍비 기록에서 발견된다 (대조. papyrus Preisigke Sb 2034:11, Kiddushin 72b, 애도에 관한 Midrash 1:85). 아브라함의 품은 또한 마카베오기 제4서 13:17에서 의인의 안식처로 나타난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요한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너희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다, 하고 말하기 시작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 (누가복음 3:8). 중간 상태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구약 성경의 위경 스바냐 계시록 9:1-5에서 발견된다. 그 구절들에서 “무저갱(無底坑)”은 “큰 구렁텅이” (누가복음 16:26)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그는 “건너는 곳”에서 하데스 (대조. 누가복음 16:28의 고통의 장소)를 피해 건너갈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11:2-4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나는 이 인용구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의 믿음과 가르침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분명히 영원한 고통을 가르치지 않으며 아마도 사망과 부활 사이에 의식적 중간상태를 가르치지도 않을 것이다.


질문 4. 성경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데 필수적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 장 25 절은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그분께서 반드시 통치해야 하나니"라고 말한다. 금세(今世)에 있든 내세(來世)에 있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선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하는 성경구절들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행전 17:30-31, 26:20). 그러나 자기의 행실을 고치는 것 (즉, 죄를 멀리하는 것)은 당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또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로마서 11:6). 또한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로마서 4:5).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당신은 그것을 벌어서 얻을 수는 없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구원은 완전히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로마서 3:24).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을 주었는데 그저 감사하며 받지 않고, 돌아서서 그에게 오래된 더러운 누더기 (이사야 64:6)를 건네 준다면 얼마나 주제넘고 어리석은 일이 될지 생각해 보라. 그것은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모욕적일 것인가! 어리석은 일을 하지말고 그냥 선물을 주는 사람을 믿고 감사로 기뻐하라!

회개를 전파하는 것은 "이것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혼날거야" 라는 말과 같다. 여기서 죄를 회개하는 것은 위협과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다. 니느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 세례자 요한은 심판의 위협으로 회개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누가복음 3:8-9). 이러한 유형의 전파는 니느웨와 같이 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임박한 진노를 막을 수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로 칭의로 이어지지 않으며 또한 이어질 수도 없다. 반면에 복음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시고" 라는 말은 위협이나 심판의 선언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과 평화의 메시지이며,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다. 믿는다면 종종 죄의 회개도 하겠지만, 이 회개는 위협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보다는 감사, 옳은 것의 깨달음,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회개를 전파하는 것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은 칭의를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이다. 복음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행동에 의존하지 않고 믿어야할 내용을 선포한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9:30-33, 갈라디아서 5:11, 베드로전서 2:8, 고린도전서 1:18).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제시와 회개의 요건을 혼합하여 복음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는 회개가 특히 이스라엘에게 전파된다. 하나님의 지상의 백성 이스라엘은 왕국을 기대하고 있지만 (사도행전 1:6), 그 왕국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 (누가 24:47, 사도행전 2:38, 사도행전 3:19). 이것이 요한이 회개를 전파한 이유이며 (마태복음 3:2), 예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라고 전파한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거절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회개, 즉 그 땅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에게 회개를 전파하는 것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사도들은 계속해서 배척당했다. 베드로와 요한과 그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사도행전 4장에서 옥에 갇혔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바울은 거듭해서 배척당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13:13-15에서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이 이사야를 인용하며 끝난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8:26-27).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 이 메시지를 계속 거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회개해야 하며 언젠가 회개할 것이다.


질문 5.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해야 하지 않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죄인을 구원하고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17, 고린도후서 5:14-21).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로마서 3:22)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 (로마서 3:23)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디모데전서 1:15),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로마서 4:4-5).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구원하시고 (로마서 5:6), 사람들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며 (로마서 5:8), 아직 원수였을 때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로마서 5:10) 그들은 그분의 보혈로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신다 (로마서 5:9).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주고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다 (에베소서 2:7-9).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이다 (고리도전서 8:6). 그러나 그분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분은 누가복음 2:11에서 묘사한 것처럼 세상에 와서 구주가 되셨다: "이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해 구원자 곧 그리스도 주께서 태어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그분의 주권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지만 (로마서 3:9-20, 로마서 3:23), 그것이 그분을 막지 못했으니,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태어나셨고 (요한복음 3:17) 세상의 구원자시니라 (요한복음 4:42, 요한일서 4:14). 하나님께 대한 열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로마서 10:2-3), 이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1:15). 그런 다음에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할 수 있다 (고리도전서 12:3).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심을 (히브리서 2:8) 그리고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심을 알고 있다 (빌립보서 2:10). 그러므로 가능한 빨리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이요 (로마서 8:9, 고린도전서 12:3), 즉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 (에베소서 1:13). 우리는 이런 자들에게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으라고" 간구한다 (골로새서 3:10).

결론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예수의 주권에 복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 (즉, 개심하지도 않았으며 구원의 복음을 믿었던 죄인들 – 대조. 로마서 4:5, 에베소서 1:13 )에게는 가능한한 빨리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할 것인데, (로마서 4:5, 에베소서 1:13) 왜냐하면 그분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8:29).


질문 6. 야고보서 2:14-26은 구원을 위해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맞다, 그렇다. 그러나 야고보가 언급한 구원은 보상의 상실과 믿는 사람의 심판 (즉 예수님의 베마 (bema)심판)에 대한 후회로부터의 구원이다 (아래 나의 설명 참조). 그는 믿는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받는 칭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모두 안전하며 자신의 생활 방식에 관계없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 (고리도전서 3:15, 고린도전서 5:5, 에베소서 1:13-14, 에베소서 4:30).

이 구절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알려주겠다.

먼저 야고보는 편지의 시작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야고보서 1:1)라고 썼다. 그는 자신을 사도라고 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1:19에서 바울은 그를 사도라고 불렀는데요) . 오히려 그는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의 서신이 권위있는 가르침보다 제자도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구원의 방법"에 대해 쓰고 있지 않다. 그는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그들을 열네 번이나 “형제들”이라고 언급한다!

다음으로, 그는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야고보서 1:1)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은 지상의 왕국의 설립을 고대하고 있고 거기서는 새 언약 약속의 영향으로 그 율법이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될 것이다 (히브리서 8:7-13). 야고보서는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야고보서 1:1, 야고보서 2:2 -- 여기서 "집회"는 문자 그대로 시너고그 (즉, 유대교의 "회당") 를 의미한다) (참조: https://biblehub.com/greek/strongs_4864.htm). 성경은 사도적 가르침과 관련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에 대해 매우 분명하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7-9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의 일치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오히려 반대로 베드로가 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 같이 내가 무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을 그들이 보았나니; (베드로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사 할례자를 위한 사도직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내 안에서도 강력하게 일하사 이방인들을 향하게 하셨느니라:) 또 기둥같이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닫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교제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우리는 이교도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자들에게로 가고자 함이라." 이방인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옳다. 무할례자들 (즉,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바울에게 맡기셨다. 야고보, 베드로, 및 요한의 서신에서 배우는 유용한 원리와 중요한 진리가 있지만,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경우에는 우리는 바울의 서신을 따라야 한다.

다음으로 야고보서 2:14-26은 믿는 사람들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즉, 형벌이 아닌 보상에 관한 심판). 야고보서 2:12-13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 받을 자들처럼 말하고 행하라. 긍휼을 베풀지 않은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느니라." 그들은 자유의 법 아래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믿는 사람들이다! 야고보서 2:12-13과 2:14-26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12-13 절에서 자유의 법에 따른 미래의 심판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심판 받을 자들처럼 말하고 행하라"는 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준다: “내 형제들아,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야고보서 2:14). 그가 믿는 사람들의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것은 형벌이나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보상에 관한 것이다. 행함이 없는 삶이 믿는 사람들이 심판받을 때 무자비한 (13 절) 보상의 상실에서 구해줄 수 있는가? 아니, 불가능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8-15에서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하고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하고 말하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나서 이어서 수고의 결과가 공개되는 "그날"에 일어날 일을 설명한다. 모두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보상의 큰 손실을 당하리니 자기 행위의 저속함 때문이라 (고리도전서 3:15). 또한 디모데후서 2:11-13도 참조해 보라.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 모든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모두가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자신의 서신을 받는 사람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5 장에서만 다섯 번을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이 형제들의 끔찍한 도덕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길들일 수 없는 혀가 있었고 질투, 투쟁, 전투, 싸움, 살인, 간음으로 가득했다! 특히 야고보서 4:1-10을 참조하라. 오늘날 가장 “세상적인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조차도 야고보가 기록한 이 믿는 사람들보다는 훌륭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야고보서 2 장 14 절에서 말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질문 7. 로마서 10:9-10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주 예수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구원받은" 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칭의된"을 의미한다면 그렇지 않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먼저, 로마서 10:9-13에서 흥미 있는 구절을 읽어보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 위에 계신 같은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9 절에서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믿음보다 먼저 나오지만 논리적 행동의 순서는 실제로 "시인" 전에 "믿음"이 있다. 이 순서는 10 절에 나와 있으며 14 절에서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되었다. 이 구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순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순서에 근거하여 우리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견해에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선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0 절에서 보이는 구원은 칭의가 아니다.

우리는 종종 "구원"이라는 단어를 "칭의"라는 단어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것은 많은 경우에 허용되지만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는 구원이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누가복음 18:42에서 맹인 거지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했을 때, 보지 못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었다. 또 다른 예는 사도행전 27:31에 바울이, "이들이 이 배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고 말했을 때이다. 그는 그 당시 폭풍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10:10의 구원이 칭의와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었으므로 그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현생의 재난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있을 때 직면할 진노로부터의 구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바울은 로마서 2:16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 날에 “격노와 진노와 환난과 곤고”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 위에 있을 것이다 (로마서 2:8-9). 그러나 바울은 또한 로마서 5 장 9 절에서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받은 사람들이 로마서 2 장에서 언급한 진노에서 실제로 구원받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기 때문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로마서 10 장 10 절에서 바울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주 예수님에 대한 시인에 대해 말할 때, 그가 말하고 있는 구원은 현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음에 대해 한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진노를 언급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데살로니가 전서 2:16, 사도행전 2:38). 베드로는 사도행전 2 장 21 절에서 재난과 진노의 날인 주의 날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는 요엘서 2:32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구출받을 것이다"고 말한다. 로마서 10 장 10 절의 구원는 현생의 진노로부터 구출받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서 9 장에서 11 장까지가 특히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많은 논의와 함께 나라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의 측면에서 온당하다.

결론적으로, "구원받은"이라는 말이 실제로 "칭의된"을 의미한다면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로마서 10 장의 맥락에서 우리는 구원이 현실의 곤경으로부터의 구출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미 칭의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질문 8.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할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요한은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는 그들을 "어린 자녀들"이라고 아홉 번,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두 번, "젊은이들"이라고 두 번, "아버지"라고 두 번, "형제들"이라고 두 번,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네 번 부른다. 또한 그는 대명사 "we(우리)"를 10 회, "us(우리를)"을 36 회나 사용한다. 이것은 요한이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지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시험하도록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요한은 자신의 목적을 밝히며 편지를 시작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1:3-4). 이 서신의 목적은 교제와 기쁨이며, 이 서신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이 교제와 기쁨을 달성하여 "그분 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확고히"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 중점을 둔다 (요한일서 3:19). 요한은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요한일서 3:2) 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는 그들의 미래의 영광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확신을 가지게 하려 함이요, 또 그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2:28)라고 기록한다. 그는 그들이 "심판의 날에 담대함" (요한일서 4:17)을 가지고 "충분한 보상을" 받기를 원한다 (요한이서 8 장).

요한일서와 야고보서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

먼저, 요한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7-9에 기록된 그가 바울과 바나바와 이룬 일치와 부합한다. 요한이,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 (요한일서 2:2)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지만, 그 구분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요한은 바울과 이룬 일치의 목적을 지키는 것에 대해 진지했다. 요한복음 3 장 7 절에서 그가 말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나가면서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도움을 받는 믿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대조. 에스라 8:21-23). 오히려 그는 유대인 중에서 믿는 사람들과 이방인 중에서 믿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었지만 (갈라디아서 3:28) 교회 초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여전히 확연했다 (사도행전 13:46, 15:2, 21:28, 로마서 1:16, 11:11, 11:17, 15:27). 당시에 회개를 선포하는 것 (사도행전 2:38, 사도행전 3:19)과 지상의 왕국에 대한 기대 (사도행전 1:6)는 바울이 할례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한 선언의 요점이었다 (갈라디아서 2:7). 요한의 기대는 그가 "마지막 때(the last time)"라고 말하고 (이것은 문자 그대로 헬라어로 "마지막 시간(the last hour)"을 의미함), 요한일서 2:18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로 요한과 나머지 사도들의 기대는 사라졌지만, 앞으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재건되고 왕국이 세워질 날이 올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로마서 11:26)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9).

다음으로 요한일서 3:17-21과 야고보서 2:14-26을 대조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요한이 바로 똑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돕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야고보서에 대한 짧은 해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그를 피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그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고히 하리로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할진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확신을 갖고" (요한일서 3:17-21). 요한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는 것은 "그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고히 하리로다"와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라는 표현에서 분명하다. 그는 이미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것” (요한일서 3:2)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단순히 "[그들을] 부르실 때에 허락하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걷도록" (에베소서 4:1) 격려하고 있다.

요한일서 4:17과 야고보서 2:13 사이에 또 다른 유사점이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이는 그분께서 어떠하신 것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요한일서 4:17). 야고보서 2:14-26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당면한 문제는 칭의가 아니라 제자도와 믿는 사람들의 심판에서의 보상이다.

요한일서와 야고보서 사이의 유사점을 넘어서서, 나는 이제 “죄를 범하지 않는 것” (요한일서 3:9, 요한일서 5:18)을 다루는 구절들과 같은 요한일서에서 좀 더 어려운 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요한일서 5:18을 보자: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함을 우리가 아노니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매 저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하느니라.”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가 맥락에서 그 구절을 볼 때, 요한이 방금,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그는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요한일서 5:16a) 고 말했음을 알게 된다. 요한이 믿는 사람들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구절과 요한일서 2:1과 같은 다른 구절을 보면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요한일서 3:9에서 그는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새 언약이 즉시 생각났다. 이것을 히브리서 8:8-13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용과 대조해 보라. 그때에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이키든 왼쪽으로 돌이키든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을 터인즉 이르기를, 이것이 길이니 너희는 그 길로 걸으라, 하리로다" (이사야 30:21). 이것을 요한일서 2:20, 요한일서 2:27과 대조해 보라. 여기서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그리고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므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새 언약의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사도행전 기간 동안 “그들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음” (히브리서 6:5)을 알기에, 요한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온당하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3:15을 살펴보자: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이것은 마태복음 5:22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와 매우 흡사하게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나는 요한이 새 언약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수훈 중에서 율법을 더 엄격하게 하셨으며 (마태복음 5-7 장), 이 더 엄격하게 된 율법은 이스라엘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왕국 시대에 시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심판이 신속하고 가혹했으며 처형된 범죄자들의 시체는 게헤나 (즉, 예루살렘 바로 아래에 위치한 힌놈 아들의 계곡)로 던져질 것이다 (대조. 이사야 66:24, 마가복음 9:43-48).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요한일서는 예언적이다. 그것은 새 언약이 완전히 성립될 날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편지를 쓰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요한일서 3:15에서 그는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거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 요한일서 5:13에서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라고 말한다. 영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 그대로 "세세(世世)의 생명"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머물 수는 없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4 장 30 절에서 썼던 것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그들은 구원받고 봉인된 진정한 믿는 사람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서 거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질문 9. 그럼 당신은 믿는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믿는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사실, 내세세(來世世) 동안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 중 하나는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7-10은 하나님의 목적,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 및 그에 따른 삶을 설명한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즉 내세세(來世世)] 속에서 보여주려 하심이라.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현생에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영광스러운 몸을 받을 때 내세세(來世世)에서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빌립보서 3:20-21). 그러나 이것을 안다고 해서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믿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계속 죄를 지으면 현생에서 엄청난 형벌을 받고 내세세에서는 보상을 상실할 수도 있다 (고리도전서 5:5, 고린도전서 3:15). 다시 말해,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지만, 그분과 함께 고통받는 사람들 (즉,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한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만이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이다 (딤후 2:11-14).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구원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경험할 때나 그 이후에도 우리의 행위에 따르지 않고 (디도서 3:5, 디모데후서 1:9)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한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됨"에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3:24).

우리의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제자도 및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련이 있다.


질문 10. 바울을 너무 많이 인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떤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바울을 이방인 (즉 비유대인)에게 가도록 선택하셨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니라" (사도행전 9:15). 예수님이 보내는 자를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복음 10:40, 요한복음 13:20).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이시지만 (요한복음 4:42, 요한일서 4:14) 육신을 따라 본질적으로 전적으로 유대인만을 위한 특별한 사역을 하셨다: “이제 내가 말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확증하려 하심이요" (로마서 15:8). 육신에 있는 동안, 그분은 오로지 이스라엘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마태복음 10:5-6, 마태복음 15:24).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여주지만, 그분은 종종 그 복음서들에서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복음 19:17). 그는 자신이 율법 아래 있었지만 (갈라디아서 4:4), 율법의 엄격성을 더 강화할 권한이 있었고 종종 그렇게 하셨다 (마태복음 5-7).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많은 귀중한 원리와 진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은혜는, 비록 힌트가 가끔씩 들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 계시되어 있지 않다. 요한복음은 전도적인 복음이다 (요한복음 20:31).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유대인의 상황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실제로 요한복음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많지만, 여기서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길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다음처럼만 말해 두겠다, 즉 요한복음에는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가 많이 있다 (요한복음 1:17).

전술한 내용에 비추어볼 때, 이방인들은 참으로 그들의 교리를 바울의 서신에서 찾아야 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의 사도직을 반복적으로 분명히 밝혔다 (로마서 1:5, 로마서 15:15-18, 에베소서 3:1-2, 에베소서 3:8, 골로새서 1:27, 디모데전서 2:7).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 외에도 누가와 베드로라는 증인도 있다 (신명기 19:15, 고린도후서 13:1). 누가는 사도행전의 거의 절반을 바울의 여행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할애했다. 베드로는 바울의 글이 성경적인 기록임을 확인했다 (베드로후서 3:15-16). 무할례자들을 위한 (즉,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은 예수 자신이 바울에게 맡겼고 (갈라디아서 1:11-12, 2:7-8) 사도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그와 일치를 이루었다 (갈라디아서 2:7-9).

더욱이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한 (문자 그대로 완수한) 사람이었다 (골로새서 1:25). 세세 (世世)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 졌던 비밀을 계시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에베소서 3:1-12, 골로새서 1:25-27). 바울은 “한 새로운 사람” (에베소서 2:15)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게 될 우리의 미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이었다 (에베소서 2:6). 이것은 온 인류 (즉, 이방인과 유대인)를 포괄하며 또한 새 언약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어떤 것도 초월하는 진리이다.